여행/해외여행

유럽 이탈리아 고대 중세 현재가 공존하는 로마180707

서로조아 2017. 8. 22. 18:58

08.07(, 맑음)

호텔출발(06:30)바티칸보안(07:20~)베드로성당(10:3012:00)중찬(~13:00)Pantheon(13:20~40)Trevi분수(13:50~14:30)스페인광장(~14:50)성당(15:00~15)중세유적(15:20~50)Colosseo경기장(16:00~20)Ariston2(19:00~)


 


판테온은 그리스어로 ‘모든 신’, 한자어로 하면 ‘전신(全神)’이라는 뜻으로 다신교인 고대 로마에서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신전이다. 르네상스 3대 천재 화가인 라파엘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건물이라고 칭한 곳으로, 죽어 여기에 묻히기를 희망했으며 현재 그의 묘가 있다.

이 판테온 양식의 지붕인 돔은 이탈리아 전역 어디에서나 성당이나 건축물의 훌륭한 교본으로 사용되었다.

이 돔 양식은 현존하는 로마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그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판테온은 기원전 27년에 아그리파(아우구스투스 대제, 즉 케사르를 계승한 인물인 옥타비아누스 대제의 사위)가 만든 것이다. 신전으로 사용되다가 80년에 화재를 입었으며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약 120년대) 때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으며, 이때 남쪽을 향해 있던 건물의 문을 북쪽으로 향하게 하여 로톤다 광장을 조성했다.

판테온에는 총 16개의 기둥이 있는데 기존의 이탈리아 건물들의 기둥과는 다른 색의 화강암이며 코린트 양식을 갖추었다. 609년 비잔틴의 포카스 황제가 교황 보니파치오 4세에게 이 건물을 공식적으로 기증했다. 이를 받은 교황은 이 건물을 성모 마리아와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성당으로 바꾸었다.

입구의 상단에는 이 건물을 아그리파가 세웠다는 내용의 글(MAGRIPPAIFCOSTER···)이 써 있다. 입구에 있는 청동문은 이민족이 침입한 5세기 때 신성 로마제국 시대의 약탈과 이후 바티칸 건축 시에 사용되어 지금 보는 것은 1500년대의 것이다.

위로는 지름 9m의 구멍이 뚫려 있으며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가 43.3m이고 바닥의 지름도 43.3m이며 1873년에 복원된 것이다. 판테온은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콘크리트로 만든 아치로 골격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 부분의 벽은 두껍고(5.9m) 위로 갈 수록 얇아져서 건축물의 하중을 최소화했다. 꼭대기의 벽 두께는 1.5m이다.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이탈리아 건국의 영웅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묘가 있다. 성모 마리아 상 아래는 천재 화가인 ‘라파엘로’의 무덤이 있다.

판테온에서 나오자마자 작은 바(Bar)들과 이집트 여신인 이지스 신전의 오벨리스크가 있는 로톤다(Rotonda) 광장이 보인다. 이 광장은 1578년에 기존의 공터를 개축해서 만든 것이다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


트레비 분수는 고대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명한 ‘처녀의 샘(Aqua Virgina)’으로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에게 물을 준 한 처녀의 전설을 분수로 만든 것이다. 분수의 정면 오른쪽 위에 이런 일화를 담은 조각품이 있다.

고대 로마 시대는 풍부한 수원과 총 14개의 거대한 수도망이 있었고 로마 전역에 물을 공급했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많은 이민족들이 침입하면서 이 수로망을 파괴했다. 그로 인해 물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물 부족은 15세기 이후에 들어서면서 새로이 로마를 재정비하려던 교황들이 여러 수도교와 분수를 만들면서 해소되었다. 그중에 제일 유명한 것이 바로 이 트레비 분수이다. 평범했던 이 분수는 1732년 교황 클레멘스13세가 니콜라 살비(Nicola Salvi)에게 명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트레비 분수의 아름다움은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최고 걸작품이라고도 한다.

이 트레비 분수가 유명하게 된 이유는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스페인 계단’이 유명해졌듯이, 영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에서 주인공인 마스트로이안니와 여주인공이 분수에 뛰어드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트레비 분수의 중앙에 있는 근엄한 모양의 부조물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며, 양쪽에 말을 잡고 있는 두 명의 신은 포세이돈의 아들인 트리톤이다. 종종 테베레 강이 범람해서 이곳까지 물에 잠길 때가 많자 바다의 신을 만들어 이를 막고자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분수 왼쪽에 날뛰는 말은 풍랑을 상징하고, 오른쪽의 말은 고요한 물을 상징한다. 건물 제일 위를 보면 라틴어로 ‘CLEMENS VII’라고 클레멘스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 AQVAM VIRGINEM이라고 적혀 있는데 ‘처녀의 샘분수’라는 것을 명명하고 있다. 양쪽에 있는 4개의 여인 조각상은 4계절을 상징한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 광장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


17세기에 이 광장 주변에 스페인 대사관이 자리를 잡음으로써 현재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전반적인 양식은 화려한 로코코(Rococo) 양식이다. 이 스페인 광장과 계단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햅번’이 걸어 내려왔던 곳으로 이 영화 이후부터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원래부터 이 광장은 수많은 세계적 예술가들이 쉬어 가던 곳이었는데 괴테, 발자크, 키츠, 셸리, 바그너 등이 즐겨찾던 곳이기도 했다.

스페인 계단 정면으로 나 있는 콘도티 거리에는 세계의 명품 브랜드 숍들이 가득 차 있다.


스페인 광장 주변 지도  

              

               

                                           












로마시대의 메인스트리트였던 포로 로마노, 로마시대 신전(神殿)터


로마제국을 연 아우구스투스의 영묘(靈廟)와 옛 성벽 절단면에 기대어 들어선 중세의 민가들

고대와 중세 로마가 어떻했음을 한자리에서 가름할 수 있는 것 같다.  

 


로마의 중심도로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 거리에 있는 로마시대 신전터.



콘스탄티누스 세례당.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례를 받는 모습을 그린 벽화를 배경으로 결혼식이 열리고 있다.



라테라노에 있는 ‘계단성당’.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예루살렘의 로마총독부에서 성(聖)헬레나(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가 뜯어 온 것이라고 한다.
기도하면서 무릎걸음으로 계단을 다 오르면 죄(罪)가 사(赦)해진다고 한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건설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처음 몇 백 년간은 특별한 예술이나 건축물이 없었다. 이런 양상은 기원전 1세기부터 변하게 된다. 로마 장군 술라는 기원전 86년 그리스의 아테네를 정복하고 수백 개의 그리스 조각상을 로마로 끌고 왔다. 이 약탈된 조각상들은 로마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후 최초의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63~기원후 14) 때부터 로마는 세련된 예술의 시대로 접어들어 궁정 건축을 비롯하여 대형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68년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37~68)의 자살로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 끝나자 후계 자리를 놓고 벌어진 투쟁에서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39~81)가 승리했다. 그는 원로원 출신이 아니라 평민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황제가 된 후 의도적으로 선대 황제 시대의 궁정예술과 결별했다. 그의 시대의 초상들은 남자답지만 그다지 세련되지는 않고 건축물 대부분은 ‘민중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평민’을 강조했다.

이런 목적으로 건설된 건축물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콜로세움이다.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 중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하고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Colossale)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경기장 옆에 네로황제가 세운 높이 30미터의 거대한 금도금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인데 전자가 유력하다.


콜로세움과 네로황제의 거대한 동상(콜로소)이 함께 서 있던 시기의 복원도 

               

콜로세움과 네로황제의 거대한 동상(콜로소)이 함께 서 있던 시기의 복원도

네로는 6일 동안 로마를 불태운 뒤 빈민구역이었던 곳에 화려한 궁전 · 정원 · 신전 · 목욕장을 세우고 심지어는 모의해전을 즐기기 위해 인공호수까지 만든다. 그때 비로소 네로는 “나도 이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네로가 죽임을 당한 뒤 인공호수가 있던 자리에 콜로세움이 건설된다.


네로의 두상


콜로세움은 72년 베스파시아누스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질서를 회복한 뒤 네로의 황금궁전(Domus Aurea) 옆에 있던 인공호수 자리에 세울 것을 명하면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콜로세움은 그의 아들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39~81)황제가 80년에 완공했다.

콜로세움 건설은 한편에서 네로가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를 제거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콜로세움 완공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아치와 볼트를 사용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거대한 바위 축대 위에 축조되었다.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 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하도록 설계되었다.


콜로세움의 내부 모습


콜로세움의 내부 모습을 재현한 그림


콘크리트와 돌로 세운 콜로세움은 가로 · 세로가 각각 190미터 · 155미터에 이르며 4층으로 된 관람석은 4만 5000개의 좌석과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입석을 갖추었는데 최대 8만 명까지 입장이 가능했다고 한다.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관중들을 보호하기 위해 직물로 만든 벨라리움(velarium)이란 천막 지붕을 설치했는데 지붕 가운데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 채광시설과 환기구 역할을 했다.


관람객은 오늘날처럼 입구에서 번호표를 받아 관람석으로 통하는 층계를 올라가서 지정된 좌석에 앉았고 5만에서 8만 명의 관람객이 단시간에 드나들 수 있었다.


콜로세움을 복원한 모습


콜로세움은 최대 지름 188미터, 최소 지름 156미터, 둘레 527미터, 높이 57미터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인데 4층을 제외하고, 1층은 토스카나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원기둥이 80개의 아치를 끼고 이어져 있다.

그리고 2층과 3층에는 조각상, 4층의 막힌 벽면에는 청동 방패들을 세웠다.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양식이 반영되긴 했지만 건축 기술의 관점에서 볼 때 콜로세움은 철저히 로마 건축이다.

받침 기둥 · 지하층 · 받침벽 · 정면부 등만 값비싼 자연석을 이용했고 내부의 토대와 담은 저렴하고 가벼운 콘크리트와 기와를 이용했다.

콜로세움 건설에 사용된 석회석은 10만 세제곱미터, 철은 330톤이다. 대리석은 특별석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콜로세움 

               

콜로세움

고고학자들과 건축가들에 따르면 콘크리트와 바위로 된 거대한 타원형의 축대를 세우고 그 위에 콜로세움을 세웠는데 건물의 엄청난 무게와 지진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70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티투스는 10만 명가량의 포로를 로마로 데리고 와 그중 4만 명을 콜로세움 공사에 투입했다고 한다. 로마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웅장한 유적으로 꼽힌다.


콜로세움이 로마식이라는 것은 ‘아치’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물론 그리스 사람들도 아치의 개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대규모 건축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콜로세움에서는 아치와 아치통로의 체계가 세 개 층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정면부에서는 그리스의 건축 원칙도 보인다.

그리스에서 중요한 건축물이었던 신전을 보면 ‘받치는 기둥과 누르는 가로대’라는 건축 원칙이 준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콜로세움에선 이러한 구조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로마식 아치들에 의해 가려졌다.

그리스의 신전에서와 달리 기둥과 가로대가 아치에 의해 눈에 띄지 않도록 한 것이다.


콜로세움에서처럼 그리스식과 로마식을 혼합해 기둥과 가로대를 사용하는 방식은 이후 유럽 건축사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모티프가 된다.

경기장은 긴 쪽이 80미터, 짧은 쪽이 50미터인데 카베아(관객석)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지하에는 칸칸이 나눠진 맹수들의 우리와 여러 방들이 있었는데 천장을 나무 바닥으로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다.

지하방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검투사 ·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다.


콜로세움의 지하 모습

검투사와 맹수들이 미로와 같은 이곳 지하방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경기에 필요한 무기들을 보관하기도 했다. 원래 지하 위에 나무 마루가 깔려서 지상과 지하가 분리되었다. 그 나무 마루 위에는 다시 모래를 깔았다. 원형 경기장을 이탈리아어로 아레나(Arena)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로 모래를 뜻하는 아레나에서 비롯된 것이다. 맹수 사냥 시합을 할 때는 숲과 나무와 언덕을 장치해 무대 효과를 살리기도 했다.


네 개의 중요한 출입구는 황제 · 고관 · 사제 등의 특별손님용이다. 나머지 관람객은 76까지 일련번호가 매겨진 지층의 아치문을 이용했다. 관객석에서 발견된 명판은 로마 사회가 엄격한 계급사회였음을 보여준다. 경기장과 경계를 이룬 여러 줄은 원로원 의원과 그 수행원들의 자리였다. 이어서 군인과 나머지 계층의 자리가 확보되었고 가장 나쁜 다섯 번째 객석은 여자들 차지였다.

검투사와 야수 간의 싸움이 처음으로 벌어진 곳으로 알려진 콜로세움에서는 놀랍게도 장내에 물을 채워 모의해전을 벌이기도 했다. 먼저 투기장을 물로 채운 다음 물속에서도 육지에서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된 말과 소들을 물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검투사들은 배에서 배로 옮겨 다니며 접전을 벌였고 최후의 한 사람이 남으면 경기가 종료되었다. 현대의 건축가들은 로마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콜로세움 장내에 물을 채웠는지 아직 정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나우마키아(naumachia)는 고대 로마에서 있었던 대규모 모의해전(模擬海戰)를 일컫는다. 콜로세움에서도 경기장에 물을 채우고 이러한 모의해전을 벌였다고 한다. 나우마키아는 이후에도 이어져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서도 이런 종류의 수상 스펙터클이 상연되었다. 그림은 콜로세움이 세워지기 전 그 터에 있었던 인공호수에서 네로황제가 즐기던 모의해전 놀이 모습으로 17세기에 제작되었다.


콜로세움은 기독교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희생된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네로황제가 기독교인을 박해했던 것은 아니다. 콜로세움은 네로가 사망한 이후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이 세워진 이래 그 무대에선 300여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이어졌다.

그 처참한 역사는, 405년 호노리우스(Flavius Honorius, 384~423)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콜로세움은 1084년 노르만의 약탈로 파괴된 후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갔다.

이후에도 지진의 피해를 입는가 하면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선 궁전과 교회를 세우기 위해 콜로세움에서 재료를 갖다 쓰는 바람에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 1744년 기독교 순교자들을 기리는 봉헌물이 되면서 콜로세움은 기독교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지하의 천장, 즉 경기장 나무 바닥 부분은 근래 발견되었다.

콜로세움하면 생사를 건 검투사들의 결투, 맹수들의 잔혹한 싸움, 맹수와 인간의 싸움, 사형수나 무고한 기독교인들의 끔찍한 처형 같은 으스스한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그 사실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검투사들에 대한 잔인한 묘사의 이면에는 로마의 퇴폐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콜로세움을 퇴폐와 악행이 만연했던 곳으로 기억하지만 당시 로마인들의 콜로세움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들은 콜로세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콜로세움이 서 있는 한 로마도 서 있으리라.

콜로세움이 무너지는 날에는 로마도 멸망하리라. 로마가 멸망하는 날에는 이 세상도 멸망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