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人生의道

양심적인 신앙생활도 자기희생적인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서로조아 2015. 3. 31. 22:46

권신찬
1923년 경북 영덕 출생
1996년 소천 (73세)


1950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목사 생활을 시작한 지 10년 뒤인 1961년, 비로소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양심의 평화를 체험했다.
이후 35년간 수많은 영혼들을 진리의 빛으로 인도하고 1996년 소천했다.

 


설교란 생활이 뒤따라야

어느 날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방에 누워 계시면서 내게 “설교란 생활이 뒷따라야 한다. 행실이 설교와 일치하지 않으면 힘이 없고 감동을 줄 수 없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나에게 하신 말씀 같았다. 언젠가 너는 자라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고, 나도 목사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이 오랜 후에 내가 목사가 되었을 때 목회의 방향을 잡아주었다


맨 앞이 어린 권신찬 목사님



어느 날 아침을 먹고 난 후였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끝내고 베틀에 올라앉아서 베를 짜고 계셨다.

그런데 한 거지가 찾아와서 밥을 좀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베 짜는 동안에는 허리도 묶고 발에는 베 짜는 신을 신어야 한다. 그것을 풀고 밥을 주는 일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거지에게 낮에 오면 밥을 줄 터이니 낮에 오라고 해서 보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사랑에서 안방으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면서 아버지께서 큰 소리로 야단을 치셨다.

예수님 믿는 집에 거지가 왔는데 밥을 주지 않고 돌려보내는 일이 어디 있느냐고 야단 치시더니 방 안으로 들어가서 안팎으로 문을 모두 잠그시고 3일간 나오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빌고 교회 어른들이 찾아와 “권영수(교회의 직분), 왜 이러시는가?” 하면서 겨우 달래 문을 열게 한 일이 있었다

'환도잡은 현실 교회' 란 제목으로...

그해 11월에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강도사 고시 중에 설교 시험이 있었는데 나는 ‘환도잡은 현실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베드로가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쳤을 때에 주님이 꾸짖으시기를 환도 쓰는 자는 환도로 망한다 하셨다. 지금 현실 교회는 환도를 잡고 서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전 노회원 목사와 장로들이 운집해 있는 곳에서 설교를 마쳤을 때에 여러 목사들이 찾아와서 통쾌했다고 하면서 장래에 유능한 설교자가 될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을 때 나는 속으로 매우 부끄러웠다.

배운 것도 별로 없는 것이 너무 큰소리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울분이 터진 것이었다. 사실 나는 목사는 되지 않으려고 부친께도 “목사 안수는 받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가 호되게 야단만 맞았다. 너를 목사로 키우는 것이 내 소원이었는데 어렵게 신학을 하고 나서 이제 목사가 되지 않겠다는 소리가 웬 말이냐고 하시면서 책망하셨다.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릴 수도 없고 해서 억지로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그 때가 29살 때였다. 강도사 시험의 설교가 주효해서 그 후에 이곳저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부흥 강사로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한번도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했다

이승만 선거 때의 이야기

영양 교회에서 내가 시무할 때 일어난 특기할 만한 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개헌에 의한 제2차 선거와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이승만 정권이 기독교인들이 모인 정부라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굉장히 부패하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무분별하게 전적으로 이승만 정권을 지지했고 교회도 공적으로 그 선거에 참여할 것을 요구해 오고 있었다.

한번은 노회(목사, 장로들이 모여서 교회 전반의 문제를 의논하는 회의)가 열렸는데 이승만 지지 선전문을 대량 갖다놓고 선전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큰 소리로 반대했다. “교회는 중립을 지켜야 하고 어느 편을 들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정치 단체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개인의 의사로 누구를 지지하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교회가 공적으로 이 일에 개입하면 안된다” 라고 주장했다.

한번은 경북 지역 전체 각 지역 대표자 회의가 있으니 참석하라고 해서 참석을 했더니 거기에서도 교회가 이승만 당선을 위해서 협력하여야 된다고 했다. 나는 반론을 전개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대 정당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는가라고 하면서 역설하자 그 회의가 흐지부지해져 버렸다. 내 논리가 맞아 말로서는 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 소식이 퍼지자 경찰서에서 조회가 와서 나를 주목하게 되었다. 경찰서장이 나를 만나자고 해서 조용히 만났는데 거기서도 여전히 굽히지 않고 말했더니 경찰서장이 감탄하면서 말씀이 맞습니다 하면서 돌아갔다.

모든 공무원이 이승만 당선 운동을 하던 때라 나는 많은 주목을 받았다. 나는 가끔 정부의 부패를 기독교인의 책임이라고 통렬히 설교 석상에서 비난했다.

당시 기독교인 중에 박영출, 황성수 씨 등 쟁쟁한 인사들이 시계 밀수에 걸려 있었고 정치적인 부패의 요인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실지로 투표할 때는 그래도 이승만 씨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찍었다. 나라는 사람이 참으로 모순된 사람이기는 하지만 다만 교회가 공적으로 선거 운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역설했던 것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안동에 가서 배 목사를 만났는데 “권목사님, 이것 참 큰일났습니다” 라고 말을 건냈다.

“무슨 큰 일이요?” 고 물었더니 지금 이북 목사들이 우리 노회 안에 모여들어와 우리 경안 노회 목사들이 큰 교회의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화가 났다. 정색을 하면서 “배목사, 목사의 입에서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소신있게 일하면 되지 않습니까? 수천 리 타향에 와서 열심히 공부하여 실력을 쌓아 일을 잘 해 그렇게 되었다면 무엇이 잘못이라는 말이요.

반대로 생각해서 우리가 이북엘 갔다고 합시다.멀리 피난 온 사람들을 동정은 못할망정 그게 무슨 목사의 할 소리입니까? 아예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세요” 라고 말리고는 그를 돌려보냈다.

너무 심한 소리 같으나 내 안에 있는 평소의 불만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목사가 된 이후에도 호남 출신 박 모 목사와 가장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떤 풀리지 않는 문제가 계속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운 중에 길을 찾다

한번은 노회가 갈라지려고 할 때에 내가 노회에서 설교를 하도록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노회석에서 “성공의 위치란?”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성공을 선언하였는데 오늘날에는 교회가 그리고 목사들이 어디에서 성공을 찾는가. 황금 방석 위에서 아니면 권력의 보좌 위에서 성공을 찾지 않는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과 반대 위치에서 성공을 찾으니 교회가 어떻게 화평이 있고 하나가 되겠는가?” 라고 소리쳤다.

정치 목사들은 풀이 죽어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찌푸리는 반면 젊은 목사와 어떤 신학생들은 미소를 지으면서 빛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설교의 반응이 두 갈래로 나타나서 정치 목사들은 설교 후에 인사도 하지 않았고 젊은 목사들과 신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속이 후련하다고 감탄을 했다.

어지러운 중에 내 할 일은 무엇인가

그때 즈음 나는 마음에 심한 갈등이 있었다. ‘교회가 이렇게 부패하고 목사들이 권력이나 명예에 눈이 어두워서 싸우고 있으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 젊은이로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의 일이기는 해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는 독야청청하리라. 혼자만이라도 성경대로 살리라’ 하고 성경을 읽던 중에 문제에 걸리고 말았다.

마태복음 22장 39절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에 대해서 나는 자신을 잃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부친 모습에서 참된 신앙생활의 이상을 무의식 속에서 가진 것이었다. 부친은 무식하고 가난한 촌로이기는 해도 생각만은 올바른 분이셨다.

내가 일곱, 여덟살 때 어떤 불쌍한 거지가 밥을 얻으러 왔다. 그때가 겨울철 저녁이었다. 문을 여시고 거지를 한참 보시더니 추우냐고 물으셨다. 예, 춥습니다 하면서 거지가 떨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체없이 솜저고리를 벗으시더니 덮어주시면서 입고 가라고 하셨다.

어떤 때는 거지를 방으로 불러들여 윗목에서 며칠을 재워 보내기도 하셨다. 거지에게서 떨어진 이가 방에 기어다니기도 했다. 어떤 신자의 어려운 사정 얘기를 들으면 도울 길이 있으면 당장에 돕고 도울 길이 없으면 밤을 새워가면서 울면서 기도를 하셨다.

내 고향은 동해안이라 6.25 때 피난 나온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거쳐갔는데 교인들은 교회를 찾아왔다. 우리 집이 바로 교회와 한마당이라 우리 집 사랑방에는 항상 함경도 피난민으로 차 있었다.

어떤 때는 부친께서 피난민들의 임시 숙소엘 찾아가서 비밀히 쌀 그릇을 조사한 뒤 쌀이 없으면 쌀을 거두어서 가져다주곤 하셨다. 일일이 다 얘기할 수 없으나 여러 가지 얽힌 이야기가 많이 있다.

나는 이런 부친 슬하에서 자라면서 저렇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마음에 믿고 그 이상을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생 때부터 꿈이 깨어지기 시작했고 이상과 현실이 맞지 않으니 갈등 속에서 헤맬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지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리라고 작정했지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내가 과연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는가 반문해 보았다.

부친 생각이 나면 부친처럼 살기로 결심했다. 나도 양복을 벗어 불쌍한 사람에게 주었는데 나중에 옷걸이를 보니 헌 옷은 나누어주고 새 옷만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어느날 고학생이 찾아왔는데 아내가 없는 틈을 타서 큰 자루에 쌀 한 자루를 퍼주었다. 아내가 들어오다가 고학생이 쌀을 메고 나가는 것을 보고 싸움이 벌어져 5일간을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거지들이 동냥오면 한 끼 먹을 돈을 주자고 결정하고 있었으나 줄 수 없을 때가 많아서 작은 동전을 주면서 “미안하다. 이것밖에 없어” 하면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지만 내 마음에는 가책이 있었다.

어느 날 대구 약정골목을 밤에 걸어가는데 어떤 거지가 한약방 앞 연탄 아궁이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나는 발이 못에 박힌 듯이 움직이질 못했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저 거지를 저대로 두고 가서 내일 내가 어떻게 설교를 하는가’ 10년 전에 시골 주파에 있을 때 비오는 날 정신이 약간 이상한 사람이 논둑가에서 헤매는 것을 집으로 데려가 방 한 칸을 완전히 비워서 재워 보냈는데 온 방 안이 흙으로 가득 차서 가족들이 불평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도 저 거지를 데려갈 수도,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었다. 그때 문뜩 생각이 스쳐가는데 옛날 소년 시절 부산에 있을 때 내가 덮던 이불을 거리의 거지에게 가져다 준 것이 생각났다.

집으로 가서 이불을 하나 가져다 주리라고 집으로 달려갔으나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김이 푹 꺼지는 것을 느꼈다. 아내의 반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니 용기가 사라졌다. 사실을 가져다 주기 싫었던 것이리라.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온갖 생각들이 스쳐갔다. ‘목사꼴이 참 말이 아니구나. 자신은 따뜻한 방에서 잠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흰 쌀밥으로 배를 채우는데 거리에 노숙하며 떨고 배 곯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고도 설교 강단에 서면 사랑하라고 외치는 것이 얼마나 가증하고 더러운 위선인가. 결국 나 목사는 위선자이며 삯군이다. 밥을 먹기 위해서이지 성령의 진리가 내 삶에 역사하기 때문에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 열두 살 때 부친이 목사의 설교를 들으시면서 목사의 설교는 생활이 제대로 서야 함이 있다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대구 칠성 교회로

어느 날 경북 노회 목사 수양회가 구룡포에서 열렸다. 목사들만 모인 곳이니 별별 목회의 경험담들이 오갔다.

나는 이상한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 주위로 잘 모였다. 내가 “목사님들, 나는 이제 목회할 자신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니 둘러앉았던 목사 중에 누가 “무슨 소리요? 권 목사는 목회 성공자라고 정평이 나 있는데 권 목사가 못하면 누가 한단 말이요?” 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 집 쌀독에 쌀 두 되가 있으면 한 되는 가난한 자에게 주고 한 되는 내가 먹어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또 다른 목사가 “왜 그런 말을 하는거요. 그것은 너무 심한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그렇게 한단 말이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라고 거든다. “그러나 성경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성경대로 하지 않고 어떻게 설교합니까?” 라고 했다.

나는 목사 수양회에서도 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대구 칠성교회에서 소식이 왔다. 옮겨올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은근히 에큐메니칼 측 교회로 옮기고 싶던 터라 승낙의사를 밝혔다.

그 교회도 별로 크지는 않았으나 과거에 쟁쟁한 인사들이 다녀간 교회였다. 신후식 목사 같은 유명한 목사가 시무했었고 그 당시에는 남상호 목사가 시무하다가 계성 학교의 교목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군수로 이름을 날리던 안태석 장로도 그 교회에 있었다.

20세 때 가을 한 번 와서 설교해 주면 들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해서 설교하러 갔다. ‘나는 삯군이다’ 라는 이상한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사실 그것은 양심의 소리였다.

삯을 받기 때문에 설교나 목회에 참으로 보람을 느끼고 있지 못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할 수 없이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삯군으로서 최선을 다 해 보겠다고 결론을 맺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눈으로 듣고 있더니 그래도 합격이 되어서 칠성교회로 옮겨갔다. 시골 촌뜨기가 발전해서 도시의 한복판에 진출한 셈이다.

또 내심으로 공부를 좀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욕심도 있어서 그리로 옮기자마자 곧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저녁에는 문법강의를 들으러 가고 새벽기도를 일찍 끝내고는 부지런히 회화공부를 다녔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오겠다는 목표가 서 있었다.

어느 날 군수였던 안태석 장로에게 내 심경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는 사실 목사 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의 현실에서는 참된 목회는 할 수 없습니다.

공부를 더 해서 농촌 청년을 기르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 일은 어떤 사람에게도 꿇리지 않는 실력이 있을 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국에 가서 공부할 목표를 세운 것이다

대성통곡하다

그러던 중에 계성 고등학교에서 성경 과목을 한 시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와서 시간 강사로도 다녔다. 그때 나는 장준하 씨가 내고 있는 「사상계」를 계속 읽고 있었는데 함석헌 옹이 쓴 글에 ‘창녀는 먹고 살기 위해서 몸을 팔고 선생은 먹고살기 위해서 학교에서 지식을 팔고 목사는 먹고살기 위해서 교회에서 윤리 도덕을 판다. 무엇이 다른가’ 라는 대목이 있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예리한 칼이 가슴을 난도질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목사는 창녀보다 더 위선적이며 악하다. 창녀는 밥을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몸을 팔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다. 그것이 얼마나 솔직한가. 그러나 나 목사는 설교하려고 강단에 설 때에 가운으로 거룩히 가장하고 입으로는 비단 같은 선한 말을 하지만 창녀의 속에 있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 속에 있지 않은가. 음란한 행동은 하지 않으나 미모의 여성을 보면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도둑질하지 않지만 돈 뭉치를 보면 욕심이 생기니 창녀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교인들이 쳐다보면 하늘에서 천사가 다시 내려온 것 같이 선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지만 마음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 맙소사. 이제는 더 이상 이 거짓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날 밤 예배당에 나가서 혼자서 대성통곡을 했다.
평소에는 새벽마다 울고불고 기도했으나 그 날은 밤중까지 얼마나 큰 소리로 울었던지 사찰 집사가 밤에 찾아들어와서 ‘목사님, 왜 이러십니까’ 하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날 좀 혼자있게 가만 두어달라고 했다. ‘하나님, 이제는 이 거짓된 일을 더는 할 수 없습니다. 내게 어떤 능력을 주시든지 아니면 다른 일을 주시든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내 생명을 제발 거두어주십시오’ 라고 탄원했다.

그래도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설교하는 것이 두렵고 설교 단상에 서면 천정에서 “네 이놈, 거짓말쟁이야.” 라고 꾸지람하시는 것 같고 언제나 마음 속에는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 탄식 소리 뿐이었다.

그런 반면 인기는 점점 더 올라가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시내의 한 두 번째 가는 큰 교회가 있었는데 어떤 장로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그 교회의 적임자는 권 목사라는 말이 돌고 있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어도 강 건너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 같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부흥회와 길기수 선교사

그러던 중에 교회 제직회의 결의로 부흥회를 열기로 했다. 강사를 초빙하려고 하니 내 마음 상태가 곤고하여 웬만한 강사는 시시해서 청할 사람이 없었다.

특히 나는 신비주의가 싫었다. 방언을 하고 병 고치는 것이 그때 유행하여 여신도 중에서 주요 인물들이 거기에 빠져 있었다. 그런 것들을 강조하는 강사는 아예 싫었다. 여자 권사나 집사들이 추천해 오지만 다 거절했다.

내 마음에 그분이면 하는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당시 부산에 계신 김인서 장로(나중에 목사가 됨)였다. 성경을 바로 가르친다고 정평이 나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그분께 편지를 내었다. 와서 집회를 좀 인도해 주십시오 했더니 답장이 왔다

사례금을 얼마 정해주면 가겠다는 답장이었다. 그 말이 솔직한 말이나 당시 내 마음에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사례금을 미리 흥정하는 가상가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영원히 강사로 모시지 않겠다” 라고 거절해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누군가가 길기수(Keith Glas)라는 네덜란드 선교사를 소개했다. 한국어를 잘하고 부흥회 인도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섭을 하여 집회를 하기로 했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길기수 선교사와 잠시 이야기할 시간이 있어서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한국 교회의 실상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했다.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는 커졌지만 질적으로는 잘못되어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집회는 일주일간이었다. 오전과 저녁만 모이고 새벽은 간단히 지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첫날부터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데 나나 한국 목사들이 설교하는 것과는 약간 방향이 달랐다.


길기수(가운데) 목사와 함께



나 자신을 생각해 보면서

집회 일정을 정해놓고 나서 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집회는 죄에 대해서 회개를 강조하는 것이 보통인데 우선 내가 죄를 미리 정리해야 집회 때 은혜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두어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내가 시골 영양읍 교회에서 일할 당시 구호물자를 취급했는데 철저히 잘 하려고 했지만 잊은 것이 하나 생각났다. 분유 한 박스를 내 마음에서 사기로 하고 돼지를 먹인 일이 떠올랐다.

미국에서는 짐승의 사료용으로 분유를 만들어 깡통에 담았는데 그것이 한국에서는 식량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것을 돼지 사료에 섞어서 먹이면 돼지가 잘 큰다는 것을 알고서는 그것을 사용했다.

그런데 어영부영하는 중에 값을 내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한 박스래야 값이 얼마 안되니 돈을 준비하고 편지에 설명을 써서 후임자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답장에 어쩌자고 그런 걸 보내서 남을 괴롭히느냐. 자기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건 말건 내 마음이 다소 가벼워졌다.

또 한 가지는 바로 얼마 전에 충북에 있다는 어떤 사람이 사택에 찾아와서 차비가 떨어졌으니 좀 도와달라고 한 일이었다. 때마침 돈이 없어서 돕지 못한다고 했더니 입었던 양복 저고리를 벗어주면서 이것을 어디에 맡기고라도 돈을 구해달라고 해서 부득이 그것을 가지고 근처에 사는 부인회 회계를 맡은 권사에게 갔다.

그분은 의사부인이니 그만한 여유는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양복을 맡겨놓고 돈을 빌려 주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에게서 편지가 오기를 돈을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있는 차에 집회날이 닥쳐와서 생각하니 길 가는 나그네의 옷을 맡아놓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싸서 주인에게 보내버렸다. 물론 돈은 보내오지 않았다. 그런 것이 나의 마음의 준비였다

드디어 진리를 발견하다


그 날은 금요일이라고 기억되는데 낮 설교 시간에 설교자가 갑자기 강대상을 세게 두드리면서 여러분 거듭났습니까? 라고 크게 외쳤다. 그 순간 나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거듭났다고 믿고 살아왔다. 신학교에서 조직신학 시간에 거듭났기 때문에 믿는다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믿는 것은 거듭났으니 믿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듭나는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이 선교사는 거듭나는 것은 자신이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선교사의 말이 사실이면 그것은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주님께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시간이 지난 후에 강사에게 잠깐 좀 만나자고 하여 사택 방에서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거듭났습니까? 하는 질문에 나는 예 하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고 물었더니 선교사의 말이 “내가 한국에 와서 집회를 인도할 때 제일 무서운 사람이 목사입니다.

이야기를 하면 마치 벽을 향하여 이야기하는 것 같고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권 목사와 얘기할 때는 다른 목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경에 무슨 의심이 있습니까?” 라고 했다. 그래서 “아닙니다. 의심은 없습니다. 성경은 100퍼센트 믿고 지금 죽어도 천당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그러면 됐지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남아 있었지만 된 것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나와는 통한다는 말은 현재 교회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을 때 의견이 일치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리고 거듭났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도 말은 맞는다. 거듭났을 때에 영 안에 참 믿음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내가 갖고 있던 믿음은 영 곧 양심 속에 믿는 믿음이 아니라 지식 곧 이성적인 믿음이었다.

이성적인 믿음 곧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시인하는 지식적인 믿음인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어도 마음의 평안이 없는 것은 그것이 영의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가 인도한 집회는 끝이 났다. 내가 그 집회에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나도 철저히 복음을 전하자는 것이었다.

1961년 11월 18일이었다. 교회에서 설교하기 위해서 토요일날 서재에 앉아 준비를 하였다.

며칠 전 동로교회에서 로마서 1장 16절을 설교했으니 이번에도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구절을 중심으로 설교하기로 하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라는 제목을 붙이고 설교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원고를 써놓고 읽으면서 설교를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하나님의 의의 출현이었다. 그 말씀은 알 것 같으면서도 확실히 몰라서 책을 참고하면서 설교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로마서 3:20~21)라는 말씀과 연결이 되어 그 말씀을 찾아 상고했다.

20절에도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 하였고 21절에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라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율법을 지켜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대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셨는데 그 의가 바로 내 의이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가 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에서 해방이 된다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린도전서 1:30)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0:2~4)

그러면 내가 여태껏 고민해 왔던 마태복음 22장 39절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라는 율법을 나는 할 수 없었는데 예수계서 내 대신 하신 것이 되지 않는가. 그러면 이제부터 죄를 함부로 지으면서 살아도 상관이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율법이 나를 구속하지 않아도 성령이 인도하시니 함부로 방종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로마서 3장 20~21절이 깨달아진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평안해지고 10여 년간 양심을 짓누르던 문제가 없어지고 내가 위선자란 생각도 사라졌다.

하도 이상해서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문제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문제가 없어졌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이 생기면서 설교 원고 쓰는 것을 중단하고 찬송을 찾아서 부르기 시작했다.

“내 죄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나의 가는 길 천국 길이요 주의 피로 내 죄를 씻었네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 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찬송가 210장)

이 찬송을 거듭 불렀다. 이제는 나에게 정죄가 없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부르고 또 불러도 끝이 없었다.

오후 2시 경에 시작해서 해가 이미 저물어버린 7시 경까지 계속 불러댔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도 먹으러 가지 않으니 고등학교 다니는 딸이 제 동생을 데리고 찾아왔다. 문을 열면서 미친 듯이 찬송을 부르는 나를 보고 “아버지, 조심하세요. 도신 것 같아요.” 한다. 나는 “오냐, 그래. 내가 돌았는지 네가 돌았는지 알 수 없으나 너도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라고 했다.

설교는 반쯤 준비되었으나 더 이상 준비할 수 없었다. 다음 예배 시간에 설교를 했는데 먼저 이렇게 말했다. “목사 생활 10년, 예수 믿은 지 39년(당시 39세)만에 이제 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 뒤로는 내가 어떻게 설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겟세마네동산에서-나애심.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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